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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바라 볼 용기

triangleofsadness 2025. 1. 13. 22:16
슬픔을 마주하다

독서의 계절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서울 시청 책 읽는 광장은 여전히 사람이 많은지요. 저는 요즘 밖에서 들리는 외국어가 신물이 날 때면 모국어 가득한 책 속으로 도망치곤 하다보니 책을 자주 읽고 있습니다.

이번 하반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혼자 있는 방” 입니다. 그 동안 살아왔던 곳을 떠나 한동안 아는 사람 없이, 방 밖을 나갈 일도 없이 고립무원 상태로 있는 시간을 많이 보냈죠.
혼자 있는 시간의 단점은 상념이 많아진다는 겁니다.그리고 상념과 함께 슬픔도 몰려오곤 하지요.
이러한 슬픔은 어떻게 다독여야 하는 걸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원인을 향해 화를 내거나 (이를 다독인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요) 회피하는 법일 것입니다.

그 동안은 슬픔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이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이전으로는 돌릴 수 없는, 그 모든 현실도 함께 긍정해야하는 것이니까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낸 날, 그렇게 저는 이제는 슬픔을 마주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고민했죠. 왜 우리는 슬픔을 느낄까. 그리고 왜 피하고 싶어할까. 어떻게 해야 이 슬픔에 의연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생각의 끝에 답을 구하고자 책장을 펼쳤습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입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21》에 연재되었던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을 비롯하여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 등에 연재했던 글과 미완성 원고를 모아 엮은 책이다. 4년 만에 펴낸 이번 산문집에서 저자가 평론가로서 작품과 세상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했던 성실한 삶과 철학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한 글을 묶은 1부에서는 헤로도토스 《역사》에서부터 헤밍웨이를 지나 박형준과 김경후의 시에 이르기까지
저자
신형철
출판
한겨레출판사
출판일
2018.09.22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저는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선택과 감정을 유사하게라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지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난 다음 장례식을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2020년,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루면서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가족이 떠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진정으로 동감할 수 있었을 때 슬픔에 위로한다는 건 정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경험은 진정한 위로를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게는 비행 출발 시간을 잘못 알아 비행기를 놓쳐본 적이 있는 사람은 같은 실수를 한 사람에게 관대한 이해와 위로가 가능하고
큰 상실을 겪어본 이들이 뒤이어 상실을 겪은 자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가 가능한 것처럼요.

세월호 유족이 이태원 유족에 건넨 말 "'열심히'가 아니라..."

10월 29일 토요일. 이태원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선 자녀, 연인, 친구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애도할 새도 없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지 150일. 하룻밤 새 사랑하는 이를

m.ohmynews.com

이창동 감독 인터뷰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건들에는 진정한 위로는 불가능한 걸까요? 그렇지 않을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처럼’ 이라는 말을 알고 있으니까요.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노력을 위한 공감도 일정 수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는 이같은 노력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왜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있죠.

슬픔을 마주보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회피하지 않는다’ 같습니다. 나의 슬픔 그리고 타인의 슬픔 모두요.
포기하고 싶을 수 있죠. 나 하나의 슬픔을 감당하기에도 너무 힘든 세상인걸요. 타인의 슬픔까지 위로하기 위해 남을 이해하려는 건 정말 많은 품이 드는 일인구요. 이 지점에서 취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남을 탓하지 않기‘ 같습니다. 가령 “네가 너무 꼬여있다“ 라던가 “힘들다는 이야기 좀 그만 해라“ 같은 거죠.
그렇기에 책에서 슬픔의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 민용근, <혜화, 동>]많은 위로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5.18과 4.3사이] , [폭력에 대한 감수성] 부분에서도 작가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추모는 남겨진 자들을 위해, 슬픔을 받아들이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거지요. 공식적 기간이 끝난 뒤에도 누군가에게 추모는 끝없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겹다고 말하는 것 또한 또 다른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슬픔을 받아 들이다

슬픔이라는 건 참 어려운 감정입니다. 기쁨은 나누기쉬워도 슬픔은 단어를 내뱉는 순간부터 그 어딘가에숨겨 두었던 내 아픈 시간을 상기 시키곤 합니다.
그래서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감정이 고양 되고 분노의 감정과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슬픔을 남이 먼저 알아봐주기를 바라기도, 그렇지 않아 실망하기도, 이 모든 것을 기대하는 내가 한심스러울 때도 있지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언급 하는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슬픔을 말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담담히 자신의 감정을 회고할 줄 아는 작가입니다.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수필 <단순한 열정> 을 읽으며 그의 글은 마치 폼페이 유적처럼, 흔적으로써 당시의 혼란스럽고 폭발적이었을 감정이 느껴진다는 감상이 떠올랐습니다.
마치 모래 사장에 파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큰 파도가 왔었나보군‘ 하고 과거 그 모래사장에서의 소동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 많은 일들이 가슴을 스쳐 지났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라고 흔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말할 수 있는건 얼마나 많은 슬픔의 파도가 지나고 그 파도 마저 잊혀지는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걸까요.

단순한 열정(세계문학전집 99)(양장본 HardCover)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은 한 여인의 범상치 않은 사랑 이야기다. 주인공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시간이 흘러 그와 헤어진 후, 그 사랑이 남겨둔 기억을 반추한다.'작년 9월 이후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고백이 보여주듯, 그 사랑은 폭풍과도 같은 열정적인 사랑이다.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하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허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저자
아니 에르노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5.03.20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다


모든 감정은 흔적을 남기지요. 결국 이겨내는 슬픔은 없는 겁니다. 슬픔이 올 때면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소리 내어 울고, 울다 깨기도 반대로 울다가 잠에 들기도 하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저도 슬픔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놓아주는건 떠나 보내는게 아닌 내 안에 안착 시키는 거더라고요. 내 일부로 인정해야 집착이 사라지고 나의 일부로서 슬픔(감정)을 솔직하게 마주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은… 많이 힘들죠 ㅋㅋ 요즘도 종종 무너지는걸요. 하지만 그 무너지는 시간까지 부정하지 않아야 모나지 않게 나의 일부가 될 수 있더라고요.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는 것과 같달까요? 슬퍼하지마! 하면 이 청개구리 같은 녀석들은 언젠가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게 되니까요. 그리고 애석하게도 슬픔을 다루는 그 시간은 오로지 혼자 견뎌야 합니다. 타인에게 슬픔을 억지로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 말이죠.

결국 우리가 바라는 ‘나를 이해하는 존재‘는 이러한 슬픔을 나누는 과정에서 나오는 처절한 나의 모든 모습들을 오롯이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억지로 나를 내보이지 않아도 어느 순간 곁에 있는 존재겠지요.

조이가 이걸 알았더라면 세상을 멸망 시키진 않았을텐데 … 또 에에올 이야기.

사실 이제는 ‘나를 이해할 사람’ 이라는 말을 믿지 않아요. 그러한 존재가 영원히 있을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고요. 그래도 제가 여전히 슬픔을 어루만져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건 슬픔이 공감의 영역이기 때문이겠죠. 공감하고 이해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온텍의 세상에 깁을 준다는 거.. 사랑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공감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너의 슬픔과 힘듬을 공유 받고 싶다는 건 상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공감, 즉 사랑 같습니다.

처음에 독서를 하면서는 여러분들은 슬픔 따위는 겪지 않았으먼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납작한 사랑 같아요. 슬픔은 살면서 크게 또는 작게 반드시 겪는 자연스러운 감정인걸요. 이를 억지로 거세한다고 앞으로의 슬픔을 피할 순 없으니까요.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그러니 저는 여러분들이 겪는 슬픔은 제가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들이면 좋겠어요. 우리가 같이 어루어만질 수 있는 슬픔만이 여러분들을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