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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데

triangleofsadness 2025. 3. 8. 00:00
태국 넷플릭스 감사합니다
서브스턴스

드디어 봤습니다. 태국 공항에서 급하게 1.5배속으로 봤지만 그럼에도 시청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미친 영화, 자극적인 영화라는 대부분 평에도 공감하지만 저에게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주된 감정은 ‘슬픔’이었습니다.
네. 슬픈 영화였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잘못된 선택등, 후회들 그 모든게 너무 안타까웠고 그 이유는 그 모습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 바디 호러 대소동은 ‘사랑받고 싶었던’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그 감정 때문에 일어난 거니까요.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게 일인 사람이잖아..

뭐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엘리자베스는 연예인입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아야 사는 사람이에요.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상도 여러 번 받고 자신의 이름이 명예의 거리에 걸릴 정도로 성공한 스타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브스턴스를 사용하는 결정적 계기는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는 스타로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죠.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게 자신의 일이었던 사람이기에,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건 어찌 보면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하죠.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는 항상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예쁜 모습, 더 어린 모습이면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서브스턴스를 사용하는 장면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수의 모습으로 받는 대중들의 관심, 업계의 스포트라이트. 이런 수를 시기하면서도 그 모습에 집착하고 망가져가는 엘리자베스를 보면 이 문장이 섬뜩하기까지 하죠.

They are going to love you


한 70% 망가진 순간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멈추지 못한 이유조차 저 메시지 때문이었으니까요. 이런 모습으로 다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수를 다급하게 깨어내면서 외치는 ‘너 사랑받을 거야, 일어나야지 ‘ 도 안타깝기만 하죠.

엘리자베스와 수는 한 존재이지만 서로는 서로를 다른 자아, 존재로 인지합니다. 저는 이를 ‘더 나은 나’ 에 집착하는 사람의 한계로 이해했어요. 내가 나아진다면, 외모적으로나 나이로나 더 나아진다면 다시 사랑 받을 수 있을까? 라는 그 허상. 하지만 ‘더 나아진 나‘ 가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이상향으로, 타인으로 인식하는 건 아닐까요?

아마 이 영화가 여성들에게 더욱 찬사를 받은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집착하는 업계의 인정이라는 게 결국 천박한 방송국 사장, 여자의 몸을 훑어보는 걸 당연시하는 남성들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어요. 이 영화는 그 거북한 모습들을 보여주죠.

이 영화를 보면서 역겨웠던 장면이 두 개 있었어요.
-방송국 사장인 하비가 엘리자베스에게 하차 통보를 하며 게걸스럽게 새우를 까먹는 장면
-펌핏업 촬영장에서 남자들이 수의 엉덩이를 프레임 단위로 쪼개보며 오류를 찾는 장면

후자 장면을 볼 때는 폭력이 없음에도 반복 재생과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해하는 수의 표정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후반부를 납작하게 이야기하면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너희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라고 하겠지만..

진심으로. 출처: x

결말부 다죽자쑈가 통쾌하긴 해도 한 사람의 인생과 결말로 보면 그 장면은 정말 슬픕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했던 선택들이 결국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괴물로 만들고 사람들의 박수 대신 비명만 받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피를 쏘아대는 장면은 메시지를 가지지만- 모두 책임이 있다- 몬스트로 엘리자수 입장에서는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해피엔딩을 무조건적인 happily ever after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지막에서 주인공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장면이 끝나는지에 따라 해피엔딩 또는 새드엔딩 아니면 그저 끝.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마지막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별에서 환상을 보며 죽는 장면이 어쨌거나 해피 엔딩으로 느껴졌어요. 어쨌든 그는 죽어야만 끝낼 수 있는 굴레에서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보는 끝을 맞이했으니까요. 그 끝이 결국은 환상이라고 해도 말이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비판하는 입장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가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루키즘과 여성을 신체 단위 하나하나 살펴서 평가 매기는 사회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를 보여주는 건 결국 여태까지 존재해온 사회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하는 것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려우니까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그가 마냥 동정하고 싶지 않은이유는 사실 제가 보여서였어요. 사랑 받고 싶은 건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 아닌가요? 저도 이 부분이 박살나니까 긴 시간 동안 갈피를 못 잡고 계속 부유하는 기분이에요. 엘리자베스로 돌아온 일주일 동안 폭식, 폭음 등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만 들었고요. 그런 사람에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는 말도 허공에다 하는 무의미한 말로 느껴지곤 하지요. 엘리자베스가 쇼에서 하차 통보 이후 받은 꽃과 새해 전야쑈 전에 받은 꽃다발은 동일해요. 하지만 전자에 꽂혀있던 꽃다발 속 ‘you were amazing’ 이란 메시지가 엘리자베스에게 위안이 되었나요?

알아요. 결국 이건 자신에게서 시작한 문제고 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누군가가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요. 그런데 해결 방법도 의지도 모르겠어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나의 모습을 본 것 같아 눈물이 나지만 그래서 이 감정의 해결 의지가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요.

결국 이 핏빛 가득한 쇼를 펼치는 엘리자베스-수도 방 안에서 어둠 속에 쌓여 있는 저도
그저 단지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죠.